청소년 나눔학교 벽화그리기 중 쉬는 시간, 왼쪽이 썬파워씨, 오른쪽이 이장우씨.
학교에서 방과 후 미술지도를 하던 썬파워(필명. 41. 거리의 미술 회원)씨에게 요청이 들어온다. 학교 담벼락에 벽화를 그려달라는 것이었다. 종이가 아닌 벽에 그리는 그림이 생소했던 썬파워씨는 여러 인터넷 사이트를 뒤져보기도 하고 업체에 문의를 했다. 하지만 벽화를 밥벌이로 하는 업체들은 그의 궁금증을 풀어주지 못했다. 그러던 중 <거리의 미술>을 알게 됐다. 전화로 이것저것 물어보니 “직접 나와서 배우라”고 한다. 그렇게 시작한 첫 벽화작업 이후 썬파워가 거리의 미술에서 동고동락한지도 10년이 넘었다..
“집에서 아이만 키우다가 주말 벽화봉사를 나가게 됐죠. 처음엔 봉사였는데 지금은 의무가 돼버렸어요. 거의 중독 수준이죠.(웃음) 작업인원이 모자라면 소수가 밤을 새워 일하거든요. 남편이나 할아버지한테 아이들을 맡기고 작업을 갈 때도 있었죠. 이번 주말엔 무조건 쉰다고 생각하다가도 막상 작업 때가 다가오면 마음이 불편해서 잠깐이라도 꼭 들르게 되요.”
장애인 단체 건물에 벽화를 그리다가 가슴 아픈 일을 겪기도 했다고. 벽화작업에 장애인 센터가족들은 기뻐했지만 이웃들이 집값 떨어진다며 작업 중지를 강요했다. 작업 내내 어렵고 힘들었는데 결국 이웃들이 구청에 민원을 제기해 3주 만에 지워져버렸다고.
트위터, ‘카라’에서 시작해 ‘한진중공업’으로
벽은 경계이자 단절이다. 바깥 공간과의 차단이기도 하다. 하지만 낡은 벽에 색을 입히니 금세 화사해진다. 삭막했던 벽이 알록달록해지자 단절의 공간은 소통의 공간으로 바뀐다. 동네의 낡은 벽에 이웃 주민들의 인생을 채우고 아이들의 희망을 심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거리의 미술> 회원들이다.
<거리의 미술>은 환경, 공공미술, 벽화제작 등을 담당하고자 1997년 12월 ‘조형연구소’라는 이름으로 창립, 이후 현재의 <거리의 미술>로 명칭을 변경했다. 주된 활동은 벽화를 필요로 하는 곳에 찾아가 봉사를 해주는 것과 ‘열우물길 프로젝트’라는 이름의 자발적 공공미술을 기획하는 것이다.
이들은 얼마 전 강정마을에 직접 찾아가 해군기지건설을 반대하는 내용의 벽화를 그리기도 했다. 어떻게 제주도 까지 가서 벽화를 그리게 됐냐는 질문에 <거리의 미술>대표를 맡고 있는 이진우(47)씨는 “이런 사건을 모르는 것도 문제고, 모르게 만드는 것도 문제”라며 “페이스 북과 트위터 등을 통해 더 많이 알려내야 하고 더 많은 예술가들이 강정마을로 가서 작업을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사실 그가 트위터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관심 있는 아이돌그룹 때문이었다. 그룹 ‘카라’의 멤버 한승연이 트위터를 시작했다 해서 그 역시 트위터를 시작했다고. “처음엔 카라소식을 봤는데 점점 사회적인 문제를 보게 됐어요. 유성기업, 한진중공업 문제를 알게 됐죠. 희망버스가 가는 날은 하루 종일 트위터에서 눈을 못 땔 때도 있어요.”
“삼강오륜식으로 운동 시작했던 것 같아”
전남 고흥에서 자란 이 대표는 시골동네의 정겨운 풍경이 눈에 선하다고 한다. 아버님이 농사를 지으셨는데 추수 때가 되면 동네 사람들 모두가 모여서 함께 일을 거들었단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농촌이 점점 힘들어지면서 이웃들은 땅을 갈아엎었다. 망해가는 농촌의 현실에 그의 집도 예외일 수 없었다. 자식들 대학 보내기 위해 처음엔 소를 팔았는데 나중엔 논밭까지 팔아야 했다.
1983년 조선대학교 서양학과에 들어간 그는 조선대민주화투쟁에 함께 하기도 했다. “학교 미술패 활동을 했어요. 주로 깃발, 현수막, 걸개그림을 그렸죠. 그리고 총학생회 간부까지 했었죠. 운동은 충·효라고 생각했어요. 부모가 생고생해서 번 돈으로 대학에 왔는데 내 납부금이 헛되이 쓰이고 있단 생각에 참을 수가 없었어요. 이런 비리사학재단은 바로 잡아야 한단 생각에 삼강오륜식으로 운동을 시작했던 것 같아요.”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에 올라와 가는패(미술패)활동을 했다. 파업 사업장이나 집회에 결합해 현수막이나 걸게 그림을 그리는 일이었다. 노조가 파업을 하거나 민중집회가 진행되는 자리면 언제나 달려갔다. 90년대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걸개그림에도 그의 손길이 묻어있다고 한다.
이 대표가 벽화를 그리기 시작한 것은 89년 여름. 농활에서 문화패의 역할로 시골 벽에 벽화를 그렸다. 그는 투쟁의 방법으로 벽화를 선택했다. 그곳에서 수입개방문제나 농민의 현실 등에 대해서 그렸다.
십정동에 색을 입히다
그 후 인천 부평구 십정동을 찾은 건 1995년. 당시 십정동은 신혼부부가 초기에 사는 출발점 같은 동네였다고 한다. 열심히 돈 벌어서 다른 곳으로 이사 가는 정류장처럼 통과하는 동네. 파전을 부치면 막걸리를 나눠먹는 동네. 그땐 동네에 우물이 있어서 그릇을 씻기도 하고 빨래를 하기도 했단다.
IMF는 평화로운 동네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놨다. 건설일용직 노동자가 많았던 마을에서는 건설경기의 위축으로 일자리가 없어졌고 남편이 실업자상태가 되니 부인들은 그동안 부업을 하던 것에서 이제는 일을 하러 나가야 했다. 일이 없는 남자들은 낮부터 술을 마시기도 했고 싸움도 벌여졌다. 한편으로 동네는 재개발 붐이 일어 외지인들이 집을 사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동네를 떠나갔다.
1997년엔 전시장에서 소외된 미술의 소통과 공공성을 부여하고자 조형연구소를 만든다. 이어 99년부터 부평구청과 남구청 등에서 지원하는 공공근로팀에 벽화감독을 맡는다. 이어 실업극복운동 인천본부에서 만들어진 벽화사업단으로 11개월 동안 공공도로와 벽에 벽화를 그리기 시작한다. 일은 점점 넓어져 2002년부터는 열우물길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동네 벽과 계단을 꾸미고 공부방 아이들과 미술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마을사진을 기록하기도 하고 주민들 인터뷰기록을 남기기 시작했다.
“나는 이 동네에서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했죠. 처음엔 동네가 많이 낙후됐으니까 조금이라도 손을 써야지 하는 소박한 심정으로 일을 시작했어요. 그러면 모두가 조금은 희망차지지 않을까 라는 작은 희망을 가졌죠.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동네에서 ‘우리 집도 그려 달라’는 요구가 많아지기 시작했어요. 그려야 할 길이 많아질수록 일도 점점 많아졌죠.”
처음 동네에 벽화를 그릴 때 주민들은 ‘재개발 된다는데 뭔 놈의 그림이냐’며 핀잔을 놓으셨다고 한다. 십정동은 재개발지역으로 선정된 지 오래다. 조그만 전기 플러그가 고장이 나도 ‘재개발만 되면’ 이라는 생각에 고치지 않았다. 벽지가 뜯어져도, 천장에 물이 새도 주거환경개선지구(재개발)였기에 손을 쓰기가 어려웠다. 집들은 점점 부서져 갔다. 주거환경개선지구로 지정된 지 벌써 14년이 됐다. 주먹하나로 막을 수 있었던 구멍이 이젠 온 몸으로도 막아지지 않는다.
“동네가 망가지고 있었어요. 벽화가 동네를 잡아주는 역할이라고 생각했어요. 벽화로 이야기 거리가 생기는 곳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는 자원봉사 우수프로그램에 신청을 해서 지원받은 돈을 쪼개고 쪼개서 그려야 할 곳을 더 늘기도 했다. 이제는 벽에 동네주민의 인생과 이야기를 담는 역할을 하고 싶다고 한다.
아름다운 동네를 꿈꾸는 화가
이 대표는 그동안 생업으로 건물의 전기 보수 일을 해왔다. 24시간 맞교대였는데 일하는 15년 동안 명절에 부모와 친지를 잘 만나지도 못했다고 한다. 하루를 꼬박 일하고 쉬어야 하는 다음날엔 <거리의 미술> 활동을 했단다. 그러다가 2009년부터는 생업마저 그만 두고 온전히 거리의 미술 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그만 둘 땐 가족들한텐 말하지 못했죠. 딱 2주 만에 들켰어요. 하루는 일 나가고 하루는 쉬어야 하는데 생활패턴이 그전과 달라지니까 아내가 눈치를 챈 거죠. 처음엔 어떻게 살까 고민도 많이 했었는데 지난 2년 동안 어떻게 또 살아왔네요.”(웃음)
이전까진 인천시자원봉사우수프로그램에 선정되어 지원을 받았는데 재작년 인천도시축전을 할 때 모든 기금이 축전으로 몰렸단다. 자원봉사센터에서 신청 받는 사업의 내용도 도시축전과 관련된 것만 받는다 해서 이후부터 자원봉사센터와는 결별을 했다. 대신 지난해는 인천문화재단에서 사랑을 나누는 미술 프로젝트에 선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올 4월부터 지자체 예산으로 지역 아이들과 함께 하는 미술프로그램을 시작했는데 구청에선 아직도 예산이 안 잡혔다면서 9월 추경예산 때까지 기다리라고 한다.
“우리가 천착하는 곳은 사회의 가장 낮은 곳이에요. 이게 연민일까라는 고민을 하기도 했었는데 ‘우리’라는 개념이 더 강한 것 같아요. 우리라는 큰 틀의 가족들과 더불어 사는 거죠. 동네 어르신들도 이 땅의 많은 아버지, 어머니들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분들과 좋은 날엔 삼겹살도 구워먹고, 안 좋은 일은 함께 나누는 아름다운 동네를 만들고 싶어요. 모든 마을엔 철물점도 있고, 정육점도 있고, 슈퍼도 있고, 미용실도 있잖아요. 그런 공동체 안에 화가나 시인도 있었으면 좋겠어요. 아름다운 문화공동체를 삶의 공동체를 만드는 게 꿈이에요. 이 동네 화가로 자리매김 하는 것이 제 꿈입니다. 그래서 동네를 그리는 일을 계속 하고 있습니다.”
“아직은 ‘제기랄’이지만 모든 꿈은 그 꿈을 버리지만 않으면 언젠간 이뤄진다.”는 그의 말에서 열우물과 화가가 사는 아름다운 십정동의 미래를 그려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