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16일 저녁,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근래 꽤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브레인>의 19회가 방영될 예정이던 날이었다. 아마도 월요일 저녁 친구와의 약속도 일찍 끝내고 본방사수를 하려던 어떤 시청자는 TV를 켠 순간 “KBS2의 요구로 방송이 중단되고 있습니다. 조속한 정상화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라는 검은 바탕의 흰글씨만 보아야 했을 것이다. 분명히 이 시청자는 최소 60여개가 넘는 채널을 볼 수 있다는 케이블TV 가입자였음이 틀림없다.
이게 무슨 봉변인가 싶었을 이 황당함은 사실 16일 저녁에만 벌어졌던 일은 아니었다. 눈썰미가 있는 시청자라면 작년 11월 말 깨끗하게 잘 나오던 KBS2, MBC, SBS가 갑자기 흐릿해진 화면으로 며칠 동안 방송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할지도 모른다. 이 때 그런 화면을 본 시청자들 또한 케이블TV 가입자, 특히 디지털 케이블TV 가입자였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는 방송 3사의 화면이 고화질의 HD방송에서 일반 화질의SD방송으로 바뀌어 각 가정으로 송출되었던 것이다.
케이블TV이나 위성방송이나 모두 한 달에 일정액을 꼬박꼬박 내면서 구입하는 일종의 방송 서비스 상품이다. HD화질에서 SD화질로 방송을 바꾸어 내보내는 것이나 KBS2 TV 방송을 중단하는 것은 예전과 똑같은 돈을 냈는데 지난달보다 더 품질이 떨어진 상품을 받거나, 아예 받지도 못하고 돈만 낸 경우와 같다.
문제는 이게 홈쇼핑이나 온라인 마켓처럼 더 나은 화질의 방송을 보내달라고 반품을 할 수도 없고, 나오지 않았다고 환불 요청을 하기도 어렵다는 점이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행여 TV에 나온 문의전화로 폭풍항의를 한 끝에 얼마간의 요금할인을 받고 정상적인 방송을 보게 되었다고 해서 괜찮다고 생각할 문제일까? <브레인>이 안 나와서 케이블 방송국에 항의를 하면 “KBS 측에서 내보내지 말라고 했다”는 말을 듣고, 다시 KBS에 항의를 하면 “지역 케이블 방송국에 문의하시라”는 어이없는 책임전가는 왜 벌어진 것일까?
유료방송의 등장: 시청자가 아닌 가입자로
어렸을 적, 어쩌다 온 가족이 아버지의 명령(?)으로 권투중계를 보러 TV 앞에 모였을 때 화면이 잘 나오지 않으면 난 어김없이 옥상으로 올라가 안테나를 이리저리 돌려야 했다. 이상하게도 내가 안테나를 손으로 잡고 있으면 잘 나오던 TV는 손만 떼면 다시 불량화면으로 돌아가던 그 기억이 선하다. 이런 방식의 방송 수신을 흔히 “직접 수신”이라고 부른다. 이런 직접수신 환경에 큰 변화가 온 것은 바로 케이블TV의 등장이었다.
케이블TV가 이전 방송 시스템과 갖는 차이는 무엇보다 프로그램을 제작하여 편성하는 채널과 이들을 각 가정에서 볼 수 있도록 망을 제공해 주는 송출이 분리되었다는 점에 있다. ‘방송국’이라는 동일한 용어를 쓰긴 하지만 프로그램을 제작하거나 구매하여 시간대별로 편성을 하는 방송국은 “채널사용사업자(PP: Program Provider)”, 이들의 방송을 전달받아 각 지역의 가구에 송출해 주는 지역의 케이블 방송국들은 “종합유선방송사업자(SO: Station Operator)”라고 부른다.
우리가 흔히 보는 채널인 OCN, tvN과 같은 채널은 채널사용사업자이며, 살고 있는 동네에서 케이블TV를 놓아 달라고 연락을 하면 집에 방문하여 케이블TV를 설치해 주고 월 요금에 따라 50개에서 100여개의 채널을 구성해주는 지역 케이블 방송국이 바로 종합유선방송사업자이다. 이와는 달리 직접수신을 통해 제작과 송출을 함께 수행하는 방송국들을 케이블TV와 구분하게 되면서 KBS, MBC, SBS, EBS 등을 “지상파” 방송이라고 부르게 되었다.1)
케이블TV의 주된 수익원은 지상파와 달리 광고가 아니라 각 지역의 가입자들이 채널 패키지 상품에 따라 내는 수신료이다. 특히 종합유선방송국, 즉 지역 케이블 방송국들은 제작은 거의 하지 않고 가입가구에 채널을 묶어서 송출하는 행위만으로 막대한 수익을 올릴 수 있다. 세금의 형태를 띠어 전기요금과 함께 내는 KBS 수신료와 달리 이들의 수신료는 더 많은 가격을 지불할수록 더 많은 채널을 공급한다는 점에서 “유료방송”의 성격을 갖는다.
제작과 송출의 분리에 기반한 유료방송 시스템은 이후 위성방송(스카이라이프), 그리고 IPTV(olleh TV, Btv, U+TV)와 같은 뉴미디어 방송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즉 위성방송이건 IPTV이건 가입자들을 확보하고 각종 채널들을 위성이나 인터넷망으로 송출하여 수신료로 수익을 올리는 사업자들이다. 결국 1995년 김영삼 정권 이래 각 정권마다 마치 의무인양 추진해 온 뉴미디어 사업이란 시청자들을 가입자라는 수익원으로 만들어 경쟁을 벌이는 유료방송사업자들의 창업과정이었다.
유료방송사업자들이 사실은 ‘방송’보다 다른 것에 더 관심이 많다는 사실은 ‘결합상품’ 판매에서 잘 나타난다. TV, 초고속인터넷, 인터넷 집전화, 무선 인터넷 등의 상품을 함께 구매하면 훨씬 싼 가격에 이용할 수 있다는 결합상품이란, 유료방송 사업자들의 입장에선 자신들이 내보내는 방송의 질과 상관없이 값싼 상품을 구성하여 가입자들을 더 많이 확보하기 위한 경쟁의 산물이다. 여기에 “3년 약정”과 같은 계약조건을 붙이면 그 기간 동안 안정적인 현금수입원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유료방송이 모두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방송의 질보다는 가입자 확보에만 열을 올리는 유료방송의 성장은 비록 서비스 “상품”이라 해도 방송이라는 상품이 가져야할 최소한의 사회적 책임과 시청자들의 자율적인 선택권을 침해하게 된다면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더욱이 우리나라의 경우 2010년 12월 기준 케이블, 위성방송, IPTV 등의 유료방송에 가입한 가구 비율은 전체 가구 1,691만 가구 중 1,481만 가구인 87.6%에 달한다. 이 수치를 달리 말하면 무료방송인 지상파(KBS, MBC, SBS, EBS)를 안테나로 직접 수신하는 가구가 12.5%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유료방송의 확대와 연관된 직접수신 가구수의 감소는 2000년까지만 해도 전체 가구의 31.1% 수준에서 2003년 17.4%, 그리고 2011년에는 10% 이하(추정치)로 급락하고 있다.2) 더욱이 유료방송의 수신환경이 때론 각 가정의 지상파 직접수신을 기술적으로도 불가능하게 만드는 배타적 환경 구축이라는 점에서 더욱 문제가 크다.
암묵적 공생에서 노골적 적대로
지역 케이블 방송국들의 KBS2 TV 방송 중단은 유료방송 수신환경이 확대되면서 벌어진 사태, 그것도 충분히 예측가능한 사건이었다. 전체 가구 중 90%에 이르는 시청자들이 이미 다른 방식으로 자신들의 프로그램을 수신하고 있고 거기에 다른 인기 채널들까지 시청하는 지금의 상황은 지상파 방송국들이 안테나를 이용한 직접수신 환경의 구축을 방기해 왔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암묵적으로 인정된 사실이지만 안테나로 TV수신이 잘 되지 않은 지역과 공간은 너무도 많았다. 도시 변두리, 산간지방은 그렇다 치고 공청 안테나가 잘 설치되지 않은 단독주택의 반지하방 같은 곳 또한 시청의 사각지대였다. 이러한 사각지대에 저가 수신료 공세를 통해 파고든 사업자들이 바로 지역 케이블 방송국들이었다.
지상파 방송사의 입장에서도 이런 상황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케이블 가입자들의 확대로 각종 송신/중계 장비를 설치하고 집집마다 다니며 수신 상태를 확인하는 번거로운 서비스들을 하지 않음으로써 비용을 아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역 케이블 방송국 또한 시청자들의 오랜 습관의 일부를 이루는 지상파 채널을 기본 패키지로 묶어 판매함으로써 신규 가입자들을 확보하는 킬러 콘텐츠로 활용해 왔다.
그러나 2009년을 즈음하여 지상파 방송사들은 이전까지 별다른 협의 없이 자신들의 채널을 편성하던 케이블 방송국들에게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라는 요구를 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주장에는 여러 배경이 있지만 두 가지만 정리해 보면 이렇다. 하나는 OCN이나 tvN처럼 자신들 역시 지역 케이블 방송국에 프로그램(채널)을 제공하는 사업자로서 정당한 콘텐츠 이용의 대가를 받아야 한다는 이유였다.
다른 하나는 일반적인 채널사용사업자와 달리 자신들은 독자적인 송출 시스템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케이블 방송국들이 자신들의 채널을 편성하여 가입가구에 내보내는 것은 “재전송”3)에 해당하는 위법행위라는 것이다. 이에 케이블 방송국들은 케이블 재전송을 통해 지상파 방송사들이 직접수신율을 높이지 않으면서도 난시청 지역 곳곳까지 시청권역을 넓혀 왔다는 점, 그리고 이를 통해 확보한 시청률로 높은 광고수익을 내왔다는 이유를 들어 별도의 콘텐츠 이용대가를 지불할 수 없다는 반박으로 맞섰다.
수차례의 소송이 진행되다가 결정적인 계기가 된 때는 작년 10월 법원이 지역 케이블 방송국 중 1위 사업자인 CJ헬로비전에게 “새롭게 케이블 방송 상품에 가입하는 수신자들에게 디지털 지상파 방송신호를 송출해서는 안된다”는 판결을 내리고 이를 위반할 경우 하루에 5,000만원, 총 1억 5,000만원을 지상파 3사에 지급하라고 결정하면서부터였다. 이에 케이블 방송국들은 특정한 시점의 가입자들만을 대상으로 지상파 재전송을 하지 않는 것은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며 법원이 결정한 금액 또한 납득하기 힘들다면서 본격적인 행동에 나섰다.
지상파 3사와 케이블 방송국 간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협상의 초점은 지상파 방송사들이 케이블 방송국들로부터 얼마만큼의 콘텐츠 이용료(저작권료)를 받아야 하는가로 좁혀졌다. 지상파나 케이블 방송국 모두 이용료의 산정방식을 케이블 가입자 1인당 얼마라는 식의 가입자당 요금(CPS: Cost Per Subscriber)으로 결정하고 그 액수를 놓고 협상에 들어갔다. 이 협상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자 케이블 방송국들은 급기야 작년 11월 28일 디지털 케이블 가입자들을 대상으로 KBS2, SBS, MBC의 HD방송을 중단하고 SD방송만을 내보내기에 이르렀다.
앞서 말한 갑자기 방송화질이 떨어진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12월 초 “가입자들의 시청권을 볼모로 한 무책임한 행동”이라는 비난이 쏟아지자 케이블 방송국들과 지상파 방송사들은 방송을 정상화시킨 후 다시 협상에 들어갔으나 여전히 이견이 좁혀지지 않았다. 결국 지난 1월 16일 케이블 방송국들이 KBS 2TV의 재전송을 전면 중단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하루 정도가 지나 양측이 간신히 합의에 도달하면서 방송이 정상화되었다.
“보편급식”만큼이나 중요한
“보편적 방송 서비스”
이런 논란을 거치면서 명확해진 사실이 있다. 1,500만여명의 가입자를 가진 케이블 방송국들에게 시청자 한 명 한 명은 양질의 방송을 볼 권리와 자유롭게 보고 싶은 방송을 택할 권리를 가진 시민이 아니라 그저 수익원 중 하나일 뿐이라는 점이 그것이다. 방송 프로그램의 제작은 거의 하지 않으면서 채널을 묶고 그것을 송출하는 이른바 ‘콘텐츠 유통업자’로서 이윤 추구의 방식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셈이다.
그러나 이윤만을 추구하는 유료방송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번 방송 중단 사태에서 지상파 방송사들 보여준 행태 또한 다를 바 없었다. 자신들은 OCN이나 tvN과는 급이 다른 지상파 방송사라는 자부심을 비치면서도 저작권료를 요구할 때는 이들과 똑같은 채널사용사업자로서의 면모를 보였고, 케이블 방송국들의 “재전송”이 위법이라고 주장하면서도 독자적인 송출 시스템을 이용한 직접수신 환경의 개선에는 별다른 투자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케이블 방송국들과의 협상과정에서 무료방송을 제공해야 하는 지상파 방송국들이 유료방송 사업자와 마찬가지로 가입자 1인당 요금 산정 방식으로 저작권료를 논의했다는 사실은 이들 역시 시청자들을 권리를 가진 시민이 아닌, 단순한 수익원으로서 취급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렇지 않고서야 시청자 1명의 가치를 산정하는 협상과정을 왜 비공개로 진행했고, 그 결과 또한 아직도 발표하지 않는 것인가.
쉽고 편한 양비론이 아니다. 적어도 이번 방송중단 사태의 근원에는 ‘무료 방송’임을 포기한 지상파 방송사들의 자기 격하가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대다수의 시청자들은 월 2,500원의 수신료를 유료방송 수신료와 같은 요금으로 보거나, 반강제적 세금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KBS와 EBS에 분배되는 수신료는 시청의 대가가 아니다. 이명박 대통령에서부터 옥탑방 자취생까지 모두 똑같은 금액으로 두 방송사의 재원을 보존해 준다는 사실은 어떤 이해집단이나 권력에도 편향되지 않고 시민들 모두의 권리를 보장해 주는 방송을 하라는 시민들의 요구에 다름 아니다. “무상급식”이 공짜급식이 아니라 우리가 내는 세금으로 아이들에게 동등한 먹거리를 보장해 준다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렇게 이해한다면 적어도 수신료로 운영되는 지상파 방송사들은 시민들이 요구하는 정보와 콘텐츠에 모두가 보편적으로 접근할 수 있도록 유료방송에 가입하지 않더라도 안테나만으로 시청하는데 불편이 없도록 해야 하는 것이 기본이다.
더욱이 향후 디지털 기술의 발달은 현재의 지상파 채널 하나를 3개의 채널로 나누어 사용할 수 있는, 따라서 현재 서울을 예로 든다면 5개의 지상파 채널이 15개의 채널로 늘어나 무료로 시청할 수 있는 환경을 가능케 하고 있다. 달리 표현하면 시민들 모두가 동등하게 일정액의 재원을 부담함으로써 소득과 지역 차이에 상관없는 보편적인 정보 서비스를 누린다는 점에서 “보편적 방송 서비스”라고 부를 수도 있다. “무상 급식”이라는 말보다 “보편 급식”이라는 말이 더 정확하듯 말이다. 그럼에도 두 차례의 방송중단 사태는 단순히 방송 사업자들의 이해관계 충돌을 넘어 이런 보편적 방송 서비스의 당연한 권리가 어떻게 무시되고 있는지를 보여준 참담함이기도 하다.
결합상품이라는 달콤한 유혹과 약정이라는 족쇄에서 묶여 있는 지금의 유료방송 환경을 넘어 누구라도 시민의 당연한 권리로 보편적 서비스를 요구할 수 있는 길은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이것은 오래된, 그러나 여전히 새로운 질문이다. ㄴ
각주
1
케이블이나 다른 송출방식을 택하지 않고 전파만을 이용한다는 의미로 지상파 방송을 규정하면 TV 방송뿐 아니라 라디오로 들을 수 있는 모든 방송들 또한 지상파 방송에 속한다.
2
유료방송의 폭발적 성장이 뉴미디어 발달에 따른 당연한 결과가 아니라는 사실은 영국의 사례에서 엿볼 수 있다. 디지털 방송만을 놓고 보았을 때 전체 1,870만 대상 가구 중 54.4%에 달하는 1018만 가구가 직접수신으로 디지털 방송을 시청하고 있으며 이들 가구 중 45.5%(약 850만) 정도가 위성이나 케이블과 같은 유료방송에 중복가입하고 있다. 물론 영국의 경우 직접수신을 통한 디지털 방송 환경이 우리나라와 많이 다른 것은 사실이지만, 유료방송의 점유율이 그다지 높지 않은 것은 분명히 시사하는 바가 크다.
3
재전송이란 지상파 방송국들이 자체적으로 송출 시스템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른 송출 시스템을 사용하는 케이블, 위성방송, IPTV 등이 지상파 방송을 내보낼 경우 전파로 수신한 지상파 방송을 자신들의 시스템으로 다시 전송한다는 의미이다. 현행 방송법에는 별도의 협의 없이 의무적으로 유료방송사업자가 전송해야 하는 지상파 채널로 KBS1과 EBS가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