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위하여 전산망은 켜지나

[38호]

[병원에 들어온 도요타 컨베이어1] “병원을 공장으로!” 최신 경영기법의 속내
신정임 기자 | lworld.sji@gmail.com 이 기사를 프린트하기 이 기사를 트위터로 보내기
2010.07.27 14:47:25

 

컨베이어가 돌아간다. 한 사람, 16개 구멍에 고깔모양 종이를 던져 넣는다. 다음 사람, 고깔모양 과자들을 그 종이에 맞춰 넣는다. 기계가 그 과자들에 아이스크림을 채워 넣는다. 그 다음 사람, 그 과자들 위에 동그란 종이들을 얹는다. 기계가 동그란 종이들을 눌러 고깔에 붙인다. 다시 다음 사람, 완성된 아이스크림들을 종이상자에 담아 포장한다.

 

기자가 잠시 경험했던 한 아이스크림공장 콘 생산라인의 작업 모습이다. 돌아가는 컨베이어 속도에 맞추기 위해 라인에 서 있는 노동자들은 갖은 기술을 연마한다. 콘 종이를 ‘투두둑’ 빠르고 정확하게 구멍 안에 던져 넣기, 뜨거운 기계가 내려오기 전에 ‘사사삭’ 얇은 종이 한 장씩 고깔 위에 얹기, 열 손가락을 ‘쩌~억’ 벌려 아이스크림 여러 개 들어올리기 등. 한편 컨베이어벨트가 돌아가는 한 노동자는 자유롭지 못하다. 자기 자리를 대신 채워줄 누군가가 오지 않는 한 화장실도 못 간다. 영락없는 기계의 부품이 되는 셈이다. 이게 비단 제조업만의 모습일까.

 

21세기, 컨베이어가 공장을 탈출했다. 제조업에서 쓰이던 각종 경영기법들이 공공기관, 서비스업 기업으로 수출됐다. 자동차, 아이스크림 등 컨베이어 위를 흘러가던 상품들이 ‘고객’이란 이름의 소비자로 대체됐다. 다른 한편엔 보이지 않는 족쇄에 묶인 노동자들이 있다. 속도를 더하고 질을 높이는 ‘서비스’로 ‘고객의 소비’를 부추긴다. 자본은 이 모든 과정을 린경영, 6시그마, ERP 등 ‘최신 경영기법’이란 화려한 말로 포장하고 있다.
병을 고치는 병원과 ‘상품, 소비’ 등의 단어와는 어울리지 않다고? 그 선입견을 깨기 위해 병원이 경영의 최첨단을 달리고 있었다. 대형병원 건물에 깔린 보이지 않는 컨베이어를 분해해 봤다.

 

최신 경영은 전산화로부터 시작됐다. 그에 걸맞게 대부분의 대형병원에서 종이차트가 사라졌다. 전자의무기록시스템(EMR)이란 전자차트로 탈바꿈한 것. 전자차트 이전에 이미 전자처방전달시스템(OCS)과 의료영상전달시스템(PACS)이 자리를 잡았다. 단순 처방뿐 아니라 각종 진료 기록, CT나 X-RAY, MRI 등의 진단 의학 검사 결과가 전산화돼 처방전이나 CT 필름 등을 뽑는 수고로움을 덜게 된 것이다.

병원의 전산화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돼 가고 있다. 2005년 12월 대한의료정보학회가 발표한 ‘요양기관 정보화 실태조사’에 따르면, 국내 병원급의 외래OCS 도입률은 75.6%, PACS 도입률은 47.1%인 것으로 나타났다. 그중 종합전문병원(대학병원급)은 2005년 현재 외래OCS가 97.6%, PACS가 90.5% 들어온 것으로 조사됐다. 1999년 종합전문병원의 PACS 도입률이 16.7%였던 것에 견주면 5배 이상 늘어난 수치다. 한편 2005년 당시까지만 해도 외래 전자차트 보급률은 20% 수준으로 그리 높지 않았다. 그 후 매년 20% 가까운 급성장을 해오는 중이다. 바야흐로 의료 정보화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의료 정보화는 병원노동자, 환자, 병원경영진 모두가 윈윈(Win-Win) 하는 정책으로 보인다. 일례로 전자차트 덕에 병원노동자들은 일일이 손으로 환자기록을 정리하는 수고로움을 덜었다. 환자 진료기록을 찾아 진료실에 전달하고 다시 처방전을 받아 조제하는 번거로움도 없어졌다. 그만큼 환자들은 대기시간이 줄어들었고 병원 경영진은 진료기록실 공간을 활용할 수 있게 됐다. 모두가 정보화의 혜택을 누리고 있는 셈이다.

원무과.jpg

병원 신경영은 전산화로부터 시작됐다. 원무과에 접수한 순간부터 외래 진찰, 검사, 투약까지 각 단계마다
소요시간이 실시간으로 체크된다. 이 시간들을 줄이는 게 신경영의 1단계 목표다. 한 종합전문병원의 접수창구.


차채만 그랜저, 엔진은 티코
그러나 꼼꼼히 살펴보면 허점이 보인다. 서울대병원 간호사이기도 한 이향춘 공공노조 의료연대 사무국장은 “전자차트 도입 후, 침대 난간을 몇 도로 올렸는지, 머리를 감겼는지, 식사 공급을 어떻게 했는지 등등 모든 행동마다 구체적으로 체크하도록 됐다.”면서 간호사들의 일이 오히려 늘어났다고 했다. 그와 함께 업무 피로도도 올라갔다. 예전엔 혈압기 정도만 넣고 다녔던 차트에 요새는 수액 등 각종 의약품에 전자차트시스템을 장착한 노트북까지 싣고 다닌다. 그 무게만 약 25kg. 그로인해 간호사들의 근골격계질환도 늘었다는 통계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환자 입장에선 대기시간이 줄었을까. 서울성모병원의 박인혜 간호사는 “EMR 도입으로 시간이 줄어든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전산화를 하긴 했지만 한 화면에서 다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컴퓨터에 진료창을 띄우고 있다가 나와서 새로 피검사창을 띄워 피검사 결과를 확인하고, CT결과를 확인하려면 또 다른 창을 띄워야 한다.”라면서 “각 창을 띄울 때마다 데이터를 불러오는데 상당히 오래 걸린다. 데이터양에 비해 서버 용량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직원들이 EMR을 보고 ‘티코 엔진에 차체만 그랜저’라고 하기도 한다.”고 전산화의 효용성을 의심했다.

또한 기술의 발단엔 늘 맹점이 뒤따른다. 지난해 11월16일은 의료 정보화의 맹점을 확인한 날이었다. ‘종이 없는 유비쿼터스 병원’을 표방하면서 지난 2005년부터 전자차트시스템을 구축했던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의 전자차트시스템에 전산 장애가 발생한 것. 오후 2시경 일어난 정보중지 사고는 저녁 7시가 다 돼서야 복구됐다. 이전 환자의 진료와 처방 기록을 확인할 수 없어 진료에 차질이 생겼고, 5시간 동안 환자들은 오랫동안 기다리는 불편을 감수해야 했다.
현대아산삼성병원.jpg
1989년 서울아산병원(좌)과 1994년 삼성서울병원(우) 등장 이후 병원들은 '기업의 경영마인드'에 눈을 떴다.
(출처: 서울아산병원, 삼성서울병원 홈페이지)


공교롭게도 같은 날 오전 9시20분 경, 분당서울대병원의 전자차트시스템도 멈췄다. 이런저런 조치를 취하던 병원 측은 결국 호스팅 서버를 재부팅해야 했다. 그렇게 하고서도 시스템이 다시 작동되는 데는 1시간여가 흘렀다. 그 시간동안 외래진료가 중단됐다. 분당서울대병원은 지난 2003년 5월 개원 당시부터 OCS, PACS는 물론 EMR를 본격 가동함으로써 첨단 디지털병원임을 홍보해왔던 병원이었다.
한 대학병원 간호사는 EMR 도입 후, 다른 환자의 처방전을 처치하는 등의 전산오류 사고가 간혹 발생한다고도 전했다.


여러 허점에도 불구하고 경영진이 의료 정보화를 추진하는 이유는 분명 있다. 종이차트 보관소 공간이 줄어든 데 이어 진료기록실을 관리하는 인력을 줄이는 부가효과까지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의료 정보화라는 첫발을 떼야 최신 경영기법이라는 징검다리를 건널 수 있다는 것이 더 큰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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