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약회사 샐러리맨 초한지

[57호]

[법률칼럼]
김학진 노무사 | 이 기사를 프린트하기 이 기사를 트위터로 보내기
2012.02.11 10:10:03

잊을 만하면 9시 뉴스에서 제약회사 영업사원의 자살 소식을 본다. 뉴스에 나올 때만 잠시 거론되는 제약영업 현실의 추악함, 병원-제약회사 간 리베이트 문제, 무리한 실적 강요. 문제는 금세 잊히고, 사건은 또 다시 일어나는 현실이 반복된다. 제약영업 노동자들의 노동현실의 열악함을 나타내는 한 단면이기도 하겠지만, 이러한 현실은 노동자의 단결을 어렵게 만드는 요소이기도 하다.

실제, 제약영업직 노동자들로 구성된 노동조합의 조직률도 그리 높지 않다. 그래서일까. 제약영업 현실은 바뀌지 않고 있으며, 영업 노동자들의 이직률은 높기만 하다. 제약회사의 근로조건은 국내와 외국계 회사 간 차이가 큰 편이다. 연봉뿐 아니라 복지부분도 외국계 제약회사가 꽤 괜찮은 편이다. 그러나 사실 영업노동자의 현실은 거의 비슷하다.


오늘은 4년째 무(無)단체협약 상태로 싸우고 있는 제약 영업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전 세계 기준으로 상위권에 손꼽히는 미국계 제약회사의 영업직으로 구성된 노조이다. 2008년 노조가 만들어졌지만, 현재까지도 단체협약은 없다. 물론, 노조사무실도 노조 전임자도 없다. 단체교섭만 지루하리만큼 많이 진행되었고, 노동위원회 조정절차만 3차례 진행하였다.

노조를 만든 이유는 영업현실 변화를 위해서였다. 특히, 무리한 영업을 강요하고 반말로 지시를 일삼는 영업지점장들의 횡포를 막고자 만들어졌다. 처음 노조를 만들었을 때 회사는 영업지점장들 중심으로 만들어진 페이퍼 노조를 앞세워 단체교섭을 거부하였다. 회사는 김앤장이라는 법률마피아를 고용해서 공격해왔지만, 법원은 “영업지점장들로 구성된 노조는 실체가 없는 휴면노조”라며 단체교섭에 나서도록 판단하였다. 2008년 7월 이야기다.

그때부터 시작된 단체교섭은 36차까지 진행되었다. 회사의 대응은 이랬다. 08년부터 10년까지는 노조사무실과 전임자부분 문제로 교섭이 장기화되었다. 2011년 교섭에서는 노조사무실과 노조전임자에 대하여 합의를 얻어냈다. 단체협약 체결이 눈앞까지 온 것이다. 그런데 회사가 조합가입범위 문제를 들고 나왔다. 회사 측 요구는 영업지점장들과 영업직 이외 노동자들을 조합원 범위에서 제외하라는 것이다. 해당 노조는 단호하였다.

회사의 주장은 “영업직 이외 사무직의 노조가입을 막자는 것은 형식상 교섭은 해야겠고, 단체협약은 맺기 싫다는 말과 같다”는 것이다. 영업지점장들의 횡포 탓에 설립한 노조이기도 했고, 지점장들로 구성된 휴면노조를 이유로 교섭거부까지 한 회사가 이제 와서 지점장은 사용자라서 노조에 가입하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건 억지라는 것이다. 또한 조합 가입 문제는 노조의 선택이며, 다른 노동자들의 단결권 행사를 방해하는 단협 조항은 맺을 수 없기에 노조가입범위 조항 자체를 삭제하자는 답을 주었다. 덧붙여 노조 설립 후 한 조합원은 승진하여 지점장을 하며 4년째 같이 싸워온 동지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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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김연아

'조합가입범위' 꼼수, 단결로 깨다

노동자에겐 단결의 자유와 선택의 자유가 있다. 반면, 사용자는 단결권행사를 방해하거나 단체교섭을 거부할 수 없다. 이는 노조법 제81조에서 규정한 부당노동행위에 해당한다. 실제 여러 노조에서 조합가입범위 조항을 한번 체결해버린 후에 매년 교섭에서 노조 측 교섭안으로 변경할 것을 요구하지만, 한번 체결한 것을 바꾸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사용자는 이 조항을 악용해 노조를 분열시키고 조합원을 탈퇴시키기도 하다. 여기서 많이 쓰이는 꼼수는 조합원을 승진시켜 비조합원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인사권으로 위장된 부당노동행위는 실체 법위반으로 잡아내기도 힘들다. 처음부터 조합가입범위 조항은 단협에 명시하지 않는 것이 최선인 것이다.  


이와 같이 조합가입범위문제로 단체교섭이 난항을 겪자 해당 노조는 노동부에 부당노동행위로 회사측을 고소했다. “노조 측 단체교섭요구안 중 대부분 합의가 되었음에도 노동자의 단결선택의 자유를 구속하는 회사 측 조합가입범위 요구는 단체교섭 거부 및 노조를 사용자 편의에 맞게 지배하려는 부당노동행위”라는 주장이었다. 필자도 고소가 받아들여질지 반신반의했다. 그런데 노동부가 “부당노동행위에 해당한다”고 결론지었다.

노조법 제81조 3항 ‘단체교섭을 정당한 이유없이 거부하거나 해태하는 행위’ 에 해당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지배개입부분은 자료가 아직 불충분해 인정할 수 없다고 했으나 이 부분도 자료가 충족되면 인정될 수 있다는 여운을 남긴 셈이다. 특이한 사례다. 어찌되었든 노조에게 명분이 더 생겼다.

현재 노조는 여러 투쟁계획을 세우고 있다. 지난 4년 동안 진행된 다양한 쟁의행위들 이외 OECD 가이드라인 위반 제소와 집중적인 투쟁을 진행하려 한다. 웃으며 함께 끝까지 할 수 있는 투쟁을 말이다. 노조사무실도 없고, 전임자도 없고, 단체협약도 없는 지난 4년의 투쟁 과정에서 탈퇴한 조합원은 없었다. 오히려 처음 7명에서 49명까지 꾸준히 증가하였다. 주기적인 회의를 통해 노조 체계를 잡아내고 점검하며 투쟁계획을 수립하였다.

조합원들이 스스로 계획한 투쟁은 전체가 같이 하였다. 40여명이 참여하는 낚시 소모임은 인기가 좋다 한다. 최근에는 조합원 심사위원회를 만들 계획까지 수립하였단다. 쉽게 조합원을 늘리기보단 이들을 단련시키는 과정이 더 필요한 거 같단다. 그 배짱이 맘에 든다. 비록 노조사무실도 단체협약도 없지만, 노조 설립 후 4년 동안 새로운 조합원들을 만나고 조직하고 함께하는 노조를 만들었다. 현재의 제약영업 현실은 암울하지만, 단순한 동료관계를 넘어 함께 웃으며 살 수 있는 동지들을 만든 것은 미래의 암울함을 예방할 힘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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